함석헌이 말하는 종교란

Think 2013. 4. 2. 14:49

 참 종교는 뿌리 찾자는 것입니다. 
함석헌, 철학 | 2010/06/11 06:30 함석헌평화포럼

“참 종교는 뿌리 찾자는 것입니다”

함석헌
에 따르면, 종교의 목적이란 “정신적인 문제를 일깨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종교가 인간의 육체뿐만 아니라 이성과 정신을 말살하고 오로지 영혼을 구원하겠다는 일념으로 일관할 때에 생기는 것은 인간을 넋빠진 몸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겁니다. 종교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육체와 이성 혹은 정신의 조화를 이룰 때 가능한 것입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현상은 종교가 인간을 괴이한 생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영혼을 강조하는 종교일수록 더 현실적이며 물질중심의 삶에 사로 잡혀 있는 경우를 봅니다. 또 그와는 반대로 종교가 인간의 현세적, 육체적 삶을 강조하다보면 이성과 정신이 나약해져서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함석헌 “종교는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모든 활동의 절정에 서는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의 정신적 활동의 산물이나 육체적 소산으로 종교가 등장한 것이 아니라 그 둘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인간 삶의 가장 중요한 좌표를 그려주는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종(宗)은 마루나 맨 꼭대기에서 모든 것을 통일, 곧 하나로 만들기 때문에 마루라 한다.” 

종교란 그 원형으로서의 뿌리를 찾아 자아의 바탈을 드러내며 완성하도록 해줍니다. 그것은 함석헌이 말한 것처럼, “생명”[삶숨]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생명은 자기 실현하자는 것, 자아의 본성 바탈을 드러내자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생명과 생각, 그리고 정신은 서로 상호작용하면서 그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의지를 쉼없이 분출합니다. 자기가 나온 곳으로 돌아-옴, 종교는 바로 그 돌아갈-곳을 일러주고 깨우쳐주는 역할을 합니다. 중심에서 벗어나려는 비본질적인 삶을 지양하고 그 뿌리를 지향하도록 해주는 것이 종교라는 말입니다. “생명의 가장 높은 운동은 돌아옴이다. 생각이란, 정신이란, 창조주에게서 발사된 생명이 무한의 벽을 치고 제 나온 근본에 돌아오는 것이다.” 

함석헌은 이러한 근본 찾기 운동을 “종교의 수직운동”이라고 말합니다. “종교적 인간은 지면에서 뻗어나가잔 인간이 아니요, 위로, 하늘로 올라가잔 인간이다. 고로 종교의 이상은 높음에, 거룩함에, 곧음에다. 종교는 수직운동이다.” 종교의 수직적 상승 운동이 인간이 지향해야 할 삶의 자세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땅의 현실을 외면하자거나 현실도피를 하자는 말이 아니라 인간의 초월적 삶의 자세가 더 우선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자기 초월적 삶이 종교가 추구해야 할 목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종교적 인간 혹은 신을 믿고 있는 인간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모름지기 인간이란 하늘을 향한 유한자의 수직적 상승과 초월자로부터의 수직적 하강이라는 상호작용 속에서 살아야 사람과 사람, 인간과 자연의 수평적, 관계적 삶도 가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사람은 자기 초월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부정을 하지 않고 자기 초월은 못한다”고 말한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 근본적인 깨우침은 급진적인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근본적이라는 의미와 급진적이라는 말은 모두 영어의 radical로 통합니다. 그러나 종교적 보수주의를 일컫는 종교적 근본주의와는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교근본주의(fundamentalism)은 교리수호적이며, 체제수호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에 타종교에 대해 매우 배타적인 태도를 취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종교를 옹호하고 변론하기 위해서 공격적, 호전적 행동도 마다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기에 반하여 그 종교가 급진적이라는 것은 종교 그 고유의 근본 즉 종교의 정신적 뿌리를 추구하기 때문에 붙여진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종교가 갖고 있는 그 고유의 뿌리와 정신을 다시 찾아보겠다는 의지와 더불어 종교적 창시자의 영성을 체득해보겠다는 미메시스적 몸부림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칼 마르크스(K. Marx)는 급진적이라는 말은 “사물을 뿌리에서부터 보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느 시대이고 종교는 자신의 근본을 끊임없이 되새기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종교적 사유는 종교적 실천에 앞서 그 뿌리, 그 본질을 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함석헌은 말합니다. “내가 사는 것은 까닭이 있어 사는 것 아니다. 그저 살고 싶어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라시니까 산다든지 하나님을 산다든지 하는 말은 결국 까닭 없다는 말이다. [......] 정신에는 까닭 없다. 하나님은 까닭 없이 있는 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저 있어서 있는 자라 한다. [......] 정신은 까닭 없이 있어 모든 그의 까닭이 되는 것이다.” 까닭 없는 정신, 까닮 없는 삶숨, 까닭 없는 인생 등의 모든 뿌리는 바로 인간의 밑바닥에서 까닭 없이 있는 존재라는 말은 아닐까요? 어쩌면 더 신비적으로 는 기계적이고 과학적인 인식을 넘어서 “까닭 없음 그 자체를 깨우치는 것”, 그것이 삶의 궁극 목적이자 종교의 뿌리 찾기는 아닐런지요.(김대식, 2010. 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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